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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회색

인공지능 시대 속에서 다시 그려내는 인간의 온도

저자소개
심은신
목차

따뜻한 회색

유리 정원

스토리

그녀의 패션

라흐마니노프의 손가락

 

 

작품 해설

작가의 말

책 소개

종교와 예술, 일상을 관통하며 저마다의 관계에 천착해 온 심은신 작가가 새롭게 마주한 문제는 바로 인공지능(AI)이다. 이는 기술적 측면뿐 아니라 예술,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인류가 현재 직면한 핵심 쟁점이다. 일상의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는 존재이다. AI로 그린 회화가 경매에서 수억 원에 팔리고,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들이 AI에 맞서 대규모 파업을 벌인 사례만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기술이 인간의 환경뿐 아니라 관계까지 재정립해 왔듯, AI는 우리에게 본질적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적 노력을 묻는다.

심은신의 중단편 소설집 따뜻한 회색에 실린 4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은 AI가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분야에 미치는 영향을 심도 있게 탐구한다. 작가는 삶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문학적으로 성찰하며, 발전된 기술 속 인물들의 모순된 관계와 삶의 현장을 정교하게 그려낸다. 심은신에게 소설은 곧 삶의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한 고뇌이다.

 

 

수록 작품별 분석

따뜻한 회색

은행이라는 철저히 효율성과 숫자가 지배하는 직무 환경 속에서 인간관계가 소거되는 현장을 보여준다. '웜 그레이'는 윤리적 방관과 고립을 의미하며, 관계가 완벽히 소거된 AI 중심의 냉혹한 파국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유리 정원

역사학자 남자가 첫사랑을 닮은 작곡가 '새봄'에게 빠지지만, 그녀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개발된 인공지능(AI)이라는 진실을 마주한다. 이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감정과 의지가 예측 가능한 기술 세계 속에서 환상으로 전락할 위험을 보여준다.

 

 

중편 스토리

냉동 기술과 홀로그램이 일상화된 150년 후의 세계를 서사적 입체감으로 그려내며, 인간이란 존재를 둘러싼 시간·기억·정체성의 문제를 확장하고 있다. 냉동 기술로 150년 뒤 미래에 해동된 주인공 '선우''해동 인간'으로서 인공지능(AI) 인간보다 열등한 계급으로 취급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선우는 결국 홀로그램 등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과거의 기억을 삭제한 채 '나답게'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겠다는 인간적 의지를 선언한다.

 

 

그녀의 패션

인공지능(AI) 반주 기기 보급의 위협 속에서 하모니아 봉사단 팀원들이 집단적 열정(Passion)과 동질감(Fashion)을 회복하는 과정을 다룬다. 인공지능의 기술적 완벽함보다 불완전한 인간의 집단적 열의가 더 큰 가치를 지님을 역설한다.

 

 

라흐마니노프의 손가락

하우스 가이더 '보미'가 피아니스트의 공연 중 치명적인 실수를 목격하고 오히려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증명이라며 안도한다. 이 작품은 AI의 완벽함에 맞서 불완전성 속에 존재하는 인간적 감동의 본질을 강조한다.

 

 

회색 지대 너머의 가장 인간다운 컬러

 

 

인공지능은 완전한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만능일 수 있지만, 소통과 공감이 필요한 인간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작금의 첨단 기술은 우리에게 '회색 지대'와 같으며, 실업이나 윤리적 딜레마 등 여러 위험성을 동반한다. 심은신의 소설집은 이러한 회색 지대 속에서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무엇을 새롭게 인식하고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독자를 이끈다. 결국, 기술 발전 끝에 펼쳐질 미래가 관계의 소거가 아닌 따뜻함을 띠는 가장 인간다운 컬러이기를 바라는 희망을 품게 하는 수작들이다.

작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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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신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국문학을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했으며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일하다 퇴직했다. 2016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장편소설에 바람 기억버블비너스단편집에 마태수난곡고흐의 변증법청소년 소설에 꿀빵 레시피가 있다공저로 2018 신예작가를 출간했다현재 한국소설가협회 및 작가포럼소설 21세기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목차

따뜻한 회색

유리 정원

스토리

그녀의 패션

라흐마니노프의 손가락

 

 

작품 해설

작가의 말

책속에서

대학 시절 내내 종일 입 다물고 아르바이트만 했어요. 졸업하려면 친구든 연인이든 사귈 틈이 없었어요. 어느덧 습관이 태도가 되고 생활이 됐나 봐요. 우리 영업부가 차라리 인공지능으로만 꽉 채워진 곳이라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아무도 소외되는 일은 없겠죠.”

(따뜻한 회색중에서)

 

 

“‘웜 그레이는 이쪽과 저쪽의 균형을 완벽하게 유지하죠. 어느 쪽에도 힘을 몰지 않고 철저히 분산하니까요. 누구에게나 착한 색이지만,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게 함정이에요. 본인 마음 편한 게 가장 중요한 컬러죠.”

(따뜻한 회색중에서)

 

 

이강우 씨는 피험자가 아닙니다. 인공지능의 완벽한 계획 속에 선택된 수혜자죠.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가슴 뛰는 운명이랄까요? 우리 모두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야 합니다. 바야흐로 인공지능 시대입니다.”

(유리 정원중에서)

 

 

남자는 담담히 제 할 말만 하고 등을 돌렸다. 그는 전지전능한 남자에게 자유의지마저 빼앗긴 느낌이 들었다. 억울해진 그는 카페 문을 나서는 남자의 등을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인공지능에게 차라리 김새봄이라고 명명해 주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더 완벽한 운명을 창조하지 않았을까요? 정말 그랬다면새봄이 소망하는 인간의 영혼까지 훔쳐낼 수 있었을 텐데

(유리 정원중에서)

 

 

테크노피아 만능 세계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그 모든 첨단 기술도 이젠 시들했다. 선우를 집요하게 붙드는 건 오직 하나, 시간의 흐름에도 꼼짝하지 않는 기억이었다. 오르간 연주를 마치고 겸연쩍게 웃던 정호의 얼굴, 본당 입구까지 걸어 나와 따뜻하게 안아주던 정호의 품, 떨면서 다가온 정호의 입술이 그리움의 끝자락에서 여전히 선명했다. 아무리 길을 막아도 기억은 냉동 보존 전으로 되돌아갔다. 현재 발 딛고 선 2175년이라는 시간과의 괴리에 숨이 막혔다.

(스토리중에서)

선우 씨, 이전 생애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다고요? 기억이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집니다. 가혹하지만 엄밀히 말해, 선우 씨는 백오십 년 전의 기억 단자에 불과해요. 급속 냉동 후 해동됐으니, 육체는 꺼질 듯 깜빡이는 불빛과 같습니다. 기억이야말로 존재 자체입니다. 고스란히 간직하면 좋겠어요. 힘들어도 옛 기억을 묵묵히 안고 가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건 없으니까요.”

(스토리중에서)

 

 

수백억 광년을 달려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에서 지구 위의 인간들만 헛된 소망을 품고 사는지도 몰랐다. 아주 잠깐 광대한 우주의 일원으로 깜빡이다 사라질 뿐, 할아버지 라파엘의 말처럼 영원히 남는 건 존재가 아니라 스토리일 터였다. 영원한 이야기. 각인된 기억. 사라지지 않는 서사. 구분할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는 시간의 바다에서 건져낼 실체는 오직 스토리뿐이었다.

(스토리중에서)

 

 

그래요, 선우 씨. 유의미한 기억의 동의어는 스토리예요. 강렬한 스토리가 돼버린 기억이 해동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 주죠. 인간에게 물리적인 기억량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항상 스토리가 문제죠.”

(스토리중에서)

 

 

어느새 다시 시선이 마주친 김 박사의 눈은 슬퍼 보였다. 인공지능의 눈이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깊었다. 그에게 이식됐을 정체 모를 인간의 슬픔이 짙게 풍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기억에 잠식당해 있는 그의 몸은 기계 장치였다. 그렇다면 그를 점령한 바이러스는 다름 아닌 익명의 스토리일 터였다.

(스토리중에서)

 

 

다시 말하지만, 존재는 스토리입니다. 스토리가 사라지면 이전 생애는 물리적 시간으로만 남습니다. 그냥 흐르는 카오스, 정의할 수 없는 초침 밖의 세계가 되죠. 분명히 온전한 자신에게서 소외될 겁니다. 하지만선우 씨 말대로 스토리 때문에 생명을 끊을 수는 없죠. 생명 안에 있을 때 스토리는 빛을 발하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생명입니다. AI 인간에게 생명이란 닿을 수 없는 별처럼 신비롭죠.”

(스토리중에서)

기기의 연주 성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인간 연주자의 열정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현악 팀원들처럼 쉽게 자리를 이탈하지는 않을 터였다. 언제까지나 묵묵히, 흔들리지 않고, 완전히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자기 사명을 다할 것이다.

(그녀의 패션중에서)

 

 

가벼운 디저트에 감동한 첼로 여신의 얼굴 위로 영어 동화 속 아멜리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어쩌면 이 카페가 숨겨놓은 진짜 이름은 ‘passion’

아니라 ‘fashion’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패션중에서)

 

 

, 선우휘도 결국 인간이었어!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탄성을 얼른 짧은 손가락으로 막았다. 실수가 피와 살을 가진 인간 선우휘를 증명해 주는 듯해 오히려 마음 따뜻해졌다. 추앙받는 은막 위의 스타가 실수로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은 상상해 보지 못했다. 초라한 인간의 연미복을 입은 선우휘가 오늘따라 왜소해 보였다. 멀고 먼 세계에 머물던 그가 처음으로 가깝게 다가왔다. 정제된 감동이 아닌, 흔들림에서 오는 위로가 영혼으로 스며들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손가락중에서)

 

 

인공지능의 완벽한 연주는 이미 그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선우휘는 사라지고 어마어마하게 긴 손가락을 가진 인공지능으로 대체된 무대가 눈앞에 그려졌다. 기계 연주자는 한 옥타브 반을 가볍게 짚어내며 라흐마니노프를 무결하게 구현해 낼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손가락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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